
작성일 : 2022-12-17 19:06

2022년 초가을에 훌쩍 내 곁을 떠나 천국으로 이사가신 부친 김병식 옹은 100년간 지구별에서 소통전문가로서 살아가셨던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셨고 일본군대로 징집되어 제주도에서 일본군에게 두들겨 맞으며 날마다 곡괭이로 땅굴만 파다가 해방되어 고향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군경비대가 창설되고 국군으로 강제징집되어 36개월간 천막에서 벼룩과 추위와 배고픔을 겪으며 전방 철책선을 지키다가 전역하여 귀가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운명에는 평안한 날이 별로 없었다. 곧장 6.25 전쟁이 터졌고 청년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고향 옥천에서 김천으로 피난을 갔지만 낙동강이 차단되어 낙동강변에서 정체되었고, 결국 김천까지 정복한 북한군에게 강제 징병되어 김천우체국에서 인민군 무전병으로 일주일을 근무해야 했다. 그러던 중 미국 폭격기의 폭탄 투하에 김천우체국이 파괴되어 벽이 무너지면서 벽쪽 책상에서 무전을 치던 아버지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치열한 한국전쟁은 군인이 모자랐던 까닭에 예비역인 아버지를 또 다시 현역 군인으로 징병했고, 그렇게 붙들려간 아버지는 연일 죽고 죽이는 그 유명한 가평전투에서 포탄 파편조각에 가슴이 한뼘이나 찢어지는 고통을 당했고 자신의 손으로 찢어진 가슴살을 소독제나 마취제가 없이 바늘로 얼기설기 꿰메야만 했고, 다행히 휴전이 됨으로서 다시금 귀가할 수 있었다.
내 아버지의 2,30대 청년기는 이렇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격동기 그 최고봉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노름과 막걸리에 빠진 스무살 연상의 큰형의 폭력을 피해 고향 옥천에서 낯선 이방지역인 상주 화령으로 이사를 갔고, 처가댁 땅의 일부분인 시제답을 붙이는 가련한 소작농으로서 청년기를 살아냈다. 도랑물을 똥통에 퍼 담아 지게로 걸머지고 거북 등처럼 갈라진 논바닥에 붓고 호미로 모를 심어야 하는 손바닥만한 산비탈 논을 부쳐야 했다. 사람만 간신히 다니는 곳에 위치한 못된 땅을 파 일구어야 했기에 농번기에는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힘들게 죽을 정도로 농삿일을 하셔야 했다.
그러나 그걸로는 자식 6남매의 배를 채울 수 없었기에 농한기에는 강냉이 튀밥을 튀는 튀밥기계를 지게에 걸머지고 30리도 넘는 곳, 속리산 구병산 자락 깊은 산중 골짜기 마을들까지 돌아다니며 100원짜리 동전을 모아 자식을 키우며 중년을 보냈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자식 6남매를 키워 주셨다. 정말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등골빠질 정도로 힘든 밑바닥 노동자로서의 삶을 내 아버지는 살아 내셨던 것이다. 그러다가 대전으로 50대 이후에 이사를 오셨고, 연탄보일러 시공 기술자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3만원을 받고 연탄 보일러를 시공하며 지내셨고, 60대가 되어서는 철도청에 철로공사 일일 노무자로 그 무거운 철로를 목에 멍에를 메어 옮기는 일을 하며 고달픈 60대를 보냈다. 그리고 70대에는 텅빈 공장을 지키는 수위로, 어머니와 같이 병원 청소부로도 삶을 살아가셨다.
그렇게 살아오신 내 아버지가 80세가 되셨을 때 나는 아버지와 둘이서 이집트와 이스라엘로 10일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 때 아버지와의 소중한 여행은 간간이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으로 내게 생생하게 떠 오른다. 정리해 보면 내 아버지는 스무살 정도를 건너뛰어서도 친구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 분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으셨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글을 틈만 나면 땅바닥에 작대기로 학습하곤 하셨다. 그래서 무학자였지만 일제시대에는 한자와 일본어 실력이 탄탄하여 일본순사들에게 통역을 했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한자와 한글을 가르쳤고, 간혹 편지에 쓰인 어려운 한자를 읽지 못하는 우체부들이 논밭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와서 한글로 베껴가기도 했다.
내가 대학교에서 철학으로 석박사를 공부할 때 70을 넘어선 아버지는 내 옆에서 영어 알파벳을 독학하면서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하셨고, 외국인만 만나면 무조건 '헬로우' 하고 다가가서 불러 세우고는 멋적어 씨익 웃으시고는 결국에는 유창한 한국말로 대화를 시작하셨다. 대전 한남대학교 옆 외국인학교에 가서도 그러셨고, 나와 함께 떠난 이집트에서도 이스라엘에서도 늘 유쾌한 분위기 메이커로 즐기며 살아가셨다.
내 아버지가 그토록 고달픈 인생을 사셔야 하셨음에도 100세 장수노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학 용어 중에 `하아로우의 실험'이 있다 심리학자 하아로우는 원숭이를 대상으로 애정실험을 했다.하아로우는 철사로 만든 딱딱한 인형과 솜과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인형을 만들어 아기 원숭이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인형의 가슴에 젖병을 넣어 아기 원숭이들이 젖을 먹게 해 보았다. 다음 날 아기 원숭이들은 부드러운 인형 원숭이에게 매달려 있더라는 것이다.
내 아버지가 100세까지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불편하고 불쾌한 환경을 승화시킬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카롭고 차가운 성격이 아니라 따스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의 아버지였기에 친구들이 몰려 들었던 것이고, 아버지는 거의 일평생 자신의 삶을 즐겁게 만들어 가셨던 행복경영사였던 것이다. 내 아버지의 자기경영 노하우는 왠만한 박사들도 부러워할 노하우이라고 확신한다. 당신이 내 아버지처럼 100세 장수노인으로 행복하려면 아니 웰에이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고 현재를 즐기며 이웃에게는 따스한 사람이 되는 습관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글> 김용진 교수, 전)한남대학교 철학과 강의교수, 국제웰빙전문가협회 협회장, 행코교수단 단장, 행복 코디네이터 창시자, 유튜브 '인생이모작 행복 코디네이터' 크리에이터, 한국공보뉴스 칼럼니스트로서 국제웰빙전문가협회를 통해 행복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투 트랙(대학교에 행복교과목 또는 행복관련학과 개설 등 지원, 마을리더 행복멘토 직무교육 의무화 입법 추진)을 실현해 가는 중에 있음.